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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07-조명숙 교감] 위클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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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07-31 10:12 조회8,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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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청소년의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조명숙 교감 ‘탈북자들의 대모’… 10년간 그들과 함께 해
최근 경험담 담은 책 내… 1998년에는 남편과 함께 탈북자 11명 입국시켜
“여자는 고운데 여덟 살짜리 딸이 하나 딸려 있다네. 어쩌나? 그 둘을 팔려면 값이 눅어(싸)지겠는데….”
“일 없슴다(걱정 없습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팔고 딸은 내 아는 한족 부부가 아이가 없는데 그곳에 양녀로 팔면 되죠.”
이 대화를 듣던 나는 속으로 피눈물이 나왔다. 함께 탔던 나이 많으신 할머니도 기가 막혔던지 “이 몹쓸 사람들, 그 불쌍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부모 자식을 갈라놓고 팔아먹겠다고?”
여명학교 교감으로 있는 조명숙(36)씨가 최근 출간한 ‘꿈꾸는 땅끝’의 한 대목이다. 조씨는 1997년 당시
외국인 노동자상담소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조씨는 1997년 북한과 국경을 맞댄 중국 투먼(圖們)시의 택시 안에서 위의 대화를 들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다 해도 청소년들은 중국 대륙에서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여명학교는 북한을 탈출한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한국에 들어온다 해도 남한의 삶은 또 다른 절망을 준다. 학교를 가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 청소년은 북한 학력에 맞게 한국 학교에 편입한다.
이들이 10대를 시작할 무렵 북한은 처절한 굶주림이 몰아쳤다. 자연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배고픔을 못 이겨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몇 년을 떠돌기도 했다. 이랬던 청소년들이 한국 학교에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함은 당연하다. 알파벳조차 외우지 못하는데 영문법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조명숙씨는 2003년 주변 사람들과 협의해 야학을 세우기로 한다. 야학의 이름은 ‘자유터’. 정규학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들의 무료 과외 교습소이다. 이 자유터에서 다시 수업 진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대안학교인 여명학교(교장 우기섭)가 만들어졌다. 여명학교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낮에는 여명학교로, 밤에는 자유터로 쓰인다. 50여명의 학생이 자유터와 여명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마치 외국 유학생처럼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여기서 다시 조명숙 교감이 쓴 ‘꿈꾸는 땅끝’의 한 대목을 보자.

“주관식 시험에서 답을 썼는데 담임선생님께 혼났습니다.”
“뭐라고 썼는데?”
“‘산업기의 노동자들은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밤패며 일을 했고 피타는 노력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에 맞서 싸워 무리죽음을 안겨주었다’라고 썼지요.”


1997년은 조씨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조씨는 삼수 끝에 1991년 단국대 사범대에 입학했지만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일에 더 끌렸다. 외국인노동자상담소와 관계를 맺은 지도 4년. 1997년이 되니 상담소도 제법 체계를 갖췄다. 그 곳에서 법률 상담을 해준 현재의 남편(이호택)도 만났고 1997년 4월에 결혼 예정이었다. 조씨는 27살 여성으로 계획 가능한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때 약혼자인 이호택 법률담당 간사를 비롯한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직원들이 한국에서 일하다 상해를 입거나 임금체불 같은 피해를 당한 중국 노동자를 돕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에서 이호택씨 일행은 북녘 동포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고 돌아와 조씨에게 전해줬다.

“탈북자들이 처참해. 한국에서 본 어떤 외국인 노동자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해. 지구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바로 북녘 동포야. 두만강변의 북한은 지금 마을 전체가 아사하기도 하고 죽을 정도로 굶은 사람은 정신을 잃고 사람을 잡아 먹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이게 내가 북녘 동포 수십 명을 만나 알게 된 진실이야.”

조씨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믿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조씨가 이들을 못 본 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사실로 인해 그의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1997년 4월 26일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신혼여행지로 중국 옌볜을 선택했다. 조씨가 중국 옌볜에서 만난 북한 동포의 실상은 남편이 전한 그대로였다.

1997년 10월, 부부는 동료 간사들과 함께 중국에서 돌보던 북한 동포 13명을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한다. 당시 황장엽 망명 사건으로 한국 외무부는 베이징에 있는 중국 대사관을 비롯한 중국 내의 한국 외교 기관으로 북한 동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제3국을 경유하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베트남 국경을 넘기로 했다. 옌볜에서 베트남 국경까지는 수천 킬로미터.

한국 정부의 도움 없이 북한 동포를 데려와야 했다. 실패하면 일행 17명 모두에게 죽음이 기다린다. 국경선 검문소에서 몇 차례 고비를 넘겼다. 베트남 국경선을 통과해 양희창(현 간디학교 교장)씨가 준비해 둔 봉고차에 올라타 12시간을 한국 대사관이 있는 하노이까지 달렸다. 당시 초조했던 12시간을 지금도 조씨는 가끔 꿈에서 본다. 13명의 북한 동포에게 신약전서를 한 권씩 쥐어 주고는 그들을 한국 대사관에 진입시켰다. 13명이 대사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부부는 외국인노동자상담소 관계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했다.

11월 15일, 대사관에 들어갔던 북한 동포 한 명이 서울에 있는 조씨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대사관에 갔던 탈북자 일행이 베트남 외무성으로 옮겨졌고 다시 중국 국경에 버려져 모두 흩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중국 국경은 지뢰밭이다. 부부는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다. 언론은 북한 동포를 중국, 베트남 어디서도 받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에서 ‘핑퐁 난민 사건’으로 불렀다.

이호택씨를 포함한 3명은 다시 베트남으로 갔고 조씨는 한국에 남아 돕기로 했다. 6개월 만에 북한 동포 13명을 모두 찾았다. 탈북자들은 늪에 빠지기도 했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지뢰 매설 지역에서 13명이 살아 남았다. 그러나 탈북자 2명은 이렇게 된 책임이 이호택씨를 포함한 3명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1998년 8월, 2명을 제외한 11명만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지난 10월 25일, 조명숙 교감은 여명학교 학생 30명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수학여행지인 충남 부여 백마강에서 이들을 만났다. 여명학교 측은 매년 학생들에게 남한 땅을 좀 더 많이 보여주고자 수학여행을 떠난다.

조씨가 처음으로 북한 동포의 굶주림을 목격한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여전히 탈북자의 인권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핵문제로 한반도에 위기가 감돈다. 여명학교와 자유터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명숙 교감에게 물었다. “통일 후에 상처가 깊이 팬 이 민족을 사랑으로 메우는 일꾼으로 키우고, 나아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가고자 합니다.”


조호진 주간조선 기자 superstor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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